교회사에 나타난 청소년 사역 - 김영동

■ 논문 초록 ■

우리는 그 동안 서구 교회의 약화, 쇠퇴 내지는 몰락에 대해서 많이 들어 왔다. 서구 교회와 제3세계 교회를 수평적으로 비교하기가 어렵지만 우리 한국 교회가 유럽을 이어 미국에서 나타나는 교회의 약화 추세를 따라 가는 듯한 현상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유럽 교회가 텅 비고 유럽에 있는 신학교들이 학생이 없어 폐쇄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고 미국에서도 그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한국 교회라고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한국 교회 미래 역사와 운명을 결정짓는 다음 세대 청소년 선교는 반기독교 정서가 팽배하며 자본주의와 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적인 가치관을 제공하는 사회 문화에서 중차대한 과제임을 인정한다. 종교 다원주의와 혼합주의가 복음의 정체성과 선교를 위협하는 시대에 과연 청소년 선교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웹2.0세대’ 혹은 ‘미전도 세대’로 불리는 청소년 세대를 향한 사역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과거는 현재를 직시하게 하는 거울이요 미래를 열어 가는 자원이라 할 수 있다. 역사가 카(E. H. Carr)는 역사의 개념 정의를 ‘과거와 현재의 만남’이라 했다. 따라서 과거 교회사 속에 나타난 청소년 선교(혹은 사역)를 이해하는 것은 시의적절하며 의미 있는 일로 생각된다.

이러한 시대적 절박한 도전 앞에서 본 논문에서는 과연 우리는 청소년 선교를 어떻게 정의하고, 그 역사의 흐름은 어떠했는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교회사 속에 나타난 청소년 사역에 대한 자료가 빈약하여 제한된 자료로 연구를 하였지만, 본 논문의 연구를 통해 얻은 결과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청소년 선교 운동의 역사를 통해서 청소년이 선교의 대상으로서는 물론 선교 주체로서 점점 그 중요성이 더해진다는 점이다. 두 번째 결과는 19세기 이래로 발전되어 온 청소년 선교 운동, 특히 대학생 선교 운동의 역사적 교훈이다. 그 역사적 교훈은 하나님은 구원 역사에 쓰실 사람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셨다는 점, 기독 학생 운동은 세계 선교라는 뚜렷한 이상과 신학적 정체성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순교 정신으로 헌신했다는 점,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는 조직은 성령 충만했고 자발적이며 창조적이며 깨어 있었다는 점, 기독 학생 운동은 복음적인 교회 연합 운동에 적극 동참한 것과 평신도 선교 사역 및 사회 개혁과 문화 창달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를 토대로 향후 한국 교회가 청소년 선교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주제어

청소년, 청소년 사역(선교), 전도, 양육, 학생 선교 운동

I. 들어가는 말

서울 어느 교회 담임 목사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 교회는 전통적이며 안정적으로 성장하여 왔고 지역 사회를 섬기는 교회로 인정받고 있다. 담임 목사는 한목협의 지도자로서 한국 개신교의 일치와 연합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바른 교회와 목회 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교회의 장래와 관련하여 그가 진단하는 미래 한국 사회는 첫째, 자연적 인구 감소로 어린이와 청소년 등 젊은 세대의 인구가 급격히 감소할 것이고,1) 둘째, 부모의 신앙이 자녀에게 계승되는 일이 현저히 줄고 있는 점, 셋째, 다문화 가정이 계속 늘어날 것으로 진단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교회에 압박하는 도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해외 타문화권 선교도 중요하고 지속해야 하지만 이제는 국내 어린이와 청소년 세대에 대한 선교도 발등에 떨어진 과제라고 강조한다. 이른바 미전도 종족 선교 못지않게 ‘미전도 세대’ 선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올해 교회 표어를 ‘땅 끝까지 복음 전파, 자녀에게 신앙 계승’으로 잡았다. 교회 성장면에서나 선교적으로 볼 때 그만큼 미래 한국 교회는 어둡고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다.

21세기의 선교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가 청소년 선교라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다음 세대의 주역이요, 특히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크리스천 문화 변혁의 의미에서다.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의 “그 나라의 청년을 나에게 보여 달라. 그리하면 그 나라의 장래를 말하리라.”는 말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청소년들이 신앙적으로 올바르게 서면 장래의 교회가 올바르게 서게 되고 부흥될 것이요 청소년들이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이 미비하면 교회의 장래가 밝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단이나 이교도들이 청소년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은 미래의 그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서다. 이슬람은 주로 20세 이하의 청소년 선교를 중심으로 한다. 불교에서도 청소년과 젊은이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세력을 확장하고 있으며 이단 종파들도 청소년들 포섭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청소년 선교는 21세기 선교의 최전방이요 미래 기독교의 모습을 규정하는 중요한 사명이다.2)

우리는 그 동안 서구 교회의 약화, 쇠퇴 내지는 몰락에 대해서 많이 들어 왔다. 서구 교회와 제3세계 교회를 수평적으로 비교하기가 어렵지만 우리 한국 교회가 유럽을 이어 미국에서 나타나는 교회의 약화 추세를 따라가는 듯한 현상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유럽 교회가 텅 비고 유럽에 있는 신학교들이 학생이 없어 폐쇄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고 미국에서도 그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니 한국 교회라고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유럽과 미국에서의 교회의 위상과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유럽에서도 자녀 세대에 신앙 계승이 이미 어려워진 지가 오래지만 ‘신앙 없이 소속된’(belonging without believing) 사람도 많지만 여전히 ‘소속되지 않고 믿는’(believing without belonging) 사람이 많다고도 한다. 그레이스 데비(Grace Davie)는 그의 책 『1945년 이후의 영국의 종교: 소속되지 않은 신앙』(Religion in Britain Since 1945: Believing Without Belonging)에서 두 가지 핵심 주제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영국에서 종교적 신앙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고조하나 종교 단체에 소속되거나 종교적 신행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이 책에서 ‘소속되지 않은 신앙’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유럽의 틀에서 볼 때 영국은 꾸준히 유럽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면서 종교 문화의 수준도 다양해졌다는 것이다.3)

종교 다원주의와 혼합주의가 복음의 정체성과 선교를 위협하는 시대에 과연 청소년 선교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웹2.0세대’ 혹은 ‘미전도 세대’로 불리는 청소년 세대를 향한 사역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과거는 현재를 직시하게 하는 거울이요 미래를 열어가는 자원이라 할 수 있다. 역사가 카(E. H. Carr)는 역사의 개념 정의를 ‘과거와 현재의 만남’이라 했다. 따라서 과거 교회사 속에 나타난 청소년 선교(혹은 사역)를 이해하는 것은 시의적절하며 의미 있는 일로 생각된다.

문제는 교회사 속에 나타난 청소년 사역에 대한 자료가 빈약하다는 것이다. 고대 교회와 중세 교회 시대에 여성과 어린이와 청소년은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으며, 그런 연유로 해서 그들에 대한 특별한 사역 기록을 찾기가 힘들다. 따라서 제한된 자료이지만 몇 가지 청소년 선교 운동 역사에 대한 연구 자료를 기초로 문헌 연구 방식으로 교회사 속에 나타난 청소년 선교운동을 고찰하려고 한다. 내용 구성은 청소년 선교 운동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하고 그 다음에 청소년 선교 운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기독 대학생 선교 운동으로서의 학생자원운동의 역사를 정리한다. 이 연구의 한계점은 청소년 선교 역사를 주로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살펴본다는 점이다. 학생 선교 운동은 독일도 포함되지만 우리 나라를 포함하여 제3세계 청소년 선교 역사는 더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II. 청소년 선교 운동의 역사: 청소년 전도와 교육4)

청소년 선교 운동의 기원을 말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혹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로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지만 어떤 이는 1881년에 세워진 The Society of Christian Endeavor로 잡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1940년대에 설립된 Young Life로 말하기도 한다. 기원에 대한 불일치의 이유는 청소년 선교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달렸기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청소년 사역(Youth ministry)을 교육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선교로 볼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다.

우선 청소년 사역을 말할 때 청소년이란 십대 소년 소녀들을 말하기도 하지만 광범위하게 중·고등학생과 대학생, 청년을 포함한다. 그리고 청소년 사역이란 청소년에게 복음전도를 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청소년 사역이라 하기 힘들고, 마찬가지로 신앙의 성숙을 도모하는 교육을 하지 않는 것도 바른 청소년 사역이라 하기 어렵다. 청소년 사역이란 선교적인 영역과 아울러 교육적인 영역을 포함한다.5) 청소년 전도와 교육은 청소년 사역의 중요한 두 가지 차원으로 인정하면서, 먼저 청소년 교육을 살펴보고 이어서 청소년 전도의 역사를 고찰한다.

A. 교육으로서의 청소년 사역

청소년 교육은 사도들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도들은 회심한 사람들의 세례 교육을 맡았다.6) 2세기에 작성된 디다케 (Didache) 또는 열두사도의 교훈(The Teaching of the Twelve Apostle)은 회심자의 교육을 위한 매뉴얼이었다. 2세기 말에 등장한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학교는 기독교교육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5세기 중엽 이후 로마 제국의 도덕적 타락과 함께 수도원 공동체가 등장하면서 교육의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중세를 지나 근대 계몽주의의 도래와 함께 대학의 설립과 더불어 기독교교육의 기회가 많이 줄어들었으며, 기독교 지성인들은 인본주의적 세계관을 성경적으로 조명하며 수정하기보다 세속적인 탐구 영역에 몰두하였다. 당시 유행했던 교육 철학은 지식 습득에 치중했다. 몇몇 기독교 신학자는 종교개혁에 참여하면서 인본주의적 세계관으로 교육 문제를 취급했다.

존 낙스, 필립 멜랑히톤, 훌더리히 츠빙글리 등은 종교개혁의 추진에 몰두했다면, 마틴 루터와 장 깔뱅은 기독교교육에 직접 영향을 미친 사상과 비전을 보여 주었다. 특히 깔뱅은 교회의 교육적 책임을 강조했고, 단순한 지식 습득보다는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교육 철학으로 발전시켰다. 반면 루터는 가정의 교육적 책임을 중요시했고, 성경의 중심성과 모든 사람의 교육을 강조했다. 루터와 깔뱅의 신학은 기독교교육을 당시 지배적이었던 그리스 철학과 르네상스 휴머니즘과 구별하는 공헌을 하였다.7)

본격적인 청소년 교육 사역의 기원은 주일학교 운동으로 볼 수 있다. 1780년 영국의 글로체스터에서 로버트 레이크스(Robert Raikes)에 의해 시작된 주일학교 운동은 빈민 청소년의 비행과 도덕적 퇴락을 막고 문해 교육을 통해 성경을 읽고 교리문답과 예배 참석을 가능하게 하였다. 주일학교 운동이 어린이로부터 청소년으로 확대된 것은 1798년 영국 노팅검에서 시작하였다.8) 미국에서 주일학교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1785년 윌리엄 엘리엇 (William Elliot)이다. 그 후 미국에서 주일학교 운동이 대대적으로 확산되었고, 미국주일학교연합회가 1824년에 발족함으로 더 발전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주일학교 운동이 교파적인 색채를 띠면서 연합의 비전이 쇠퇴하였고, 교육은 암송 구절의 단순한 반복으로 축소되었다.9) 이러한 지배적인 흐름 속에 예외적인 운동이 등장했으니 바로 드와이트 무디가 이끈 시카고 주일학교였다. 1859년에 시작한 무디 주일학교 운동은 전도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운동을 시작한 지 5년째에는 1,500명의 학생이 등록하는 열매를 맺었다.

1844년 영국에서 창설된 YMCA와 1858년에 시작한 YWCA는 “구직이 용이한 도시 정글 속에 들어간 기독 청년들이 기독교적 헌신을 계속하도록 돕는”10)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주일학교 운동과 YMCA 운동이 19세기 신앙 교육과 성장의 매체였다면 호레이스 부쉬넬 (Horace Bushnell)은 새로운 신앙 교육의 장을 연 장본인이었다. 그는 기존의 신앙 교육이 주로 부흥 운동 형태를 띠는 것에 강한 도전을 하였다. 그는 신앙 부흥 전도 집회를 거부하고 기독교 양육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의 신학의 핵심 논지는 “어린이는 기독교인으로 양육받아야 하지 결코 다른 존재로 될 수 없다.”11)이다. 그의 주장은 20세기에 와서야 크게 각광을 받았지만 기독교교육 운동에 미친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의 기독교 양육 운동은 20세기 기독교 운동의 진보 진영과 중도 진영에게 공히 영향을 미친 하나의 원천인 셈이다. 그로 인해 신학에서 기독교교육이 하나의 독립된 분야가 되었다.12)

무디의 부흥 운동이 청소년을 ‘작은 성인’으로 간주하여 회심을 중시하였지만, 부쉬넬의 기독교교육의 사회화 접근법은 기독교교육으로서의 청소년 사역에 한 원류가 되었다. 그리고 19세기 주일학교 운동의 태동 이래로 기독교교육은 대개 교회 안에 있는 청소년의 양육에 관심을 두었으며 교회 바깥에 있는 청소년 전도에는 큰 관심을 두지 못했다. 특히 19세기 말엽에 이르러 사춘기의 연령이 앞당겨지고 결혼 연령이 늦추어짐과 아울러 공립 고등학교의 기하급수적인 증가로 부쉬넬의 양육 이론이 더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랜시스 클라크와 The Society of Christian Endeavor(1881)가 등장하였다. 클라크는 지역 교회 목사로서 구원의 체험을 한 청소년이 교회 내에서 그들의 신앙을 지속하게 하기 위한 노력에서 시작하여 만든 것이 The Society of Christian Endeavor이다. 이 단체는 클라크의 노력이 한 지역 교회 내에만 머물지 않고 교단 간의 연합 운동으로 확산되어 나타난 형태이다. 이 연합 운동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교회 지체들 간에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촉진하고 상호간의 교제의 폭을 넓히며, 하나님을 섬기기에 더욱 유용하게 한다.”13) 19세기 말과 20세기 전반부에 걸쳐 사춘기 청소년에 대한 최초의 의미심장한 교육 운동은 바로 The Society of Christian Endeavor였다.

The Society of Christian Endeavor의 회원 자격은 나이가 13세에서 30세에 이르며, 회원 종류는 정회원과 준회원으로 나뉘었다. 정회원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활동하기로 서약한 사람이며, 준회원은 회원으로서 활동하기를 원하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원치 않는 사람들이다. The Society of Christian Endeavor의 일차적 관심은 분명하게 교회 청년의 신앙 양육이었지만, 준회원의 선교를 지향하는 선교적 사역이었다. 그렇다고 직접적인 전도나 설교나 부흥 운동을 한 것은 아니고 관계 형성과 간증의 형태를 통해 전도의 열매를 거두었다.

20세기 전반부에 보수적이며 근본주의적인 교회와 교파들은 자유주의적인 국제종교교육협회(International Council of Religious Education, ICRE)와 연관이 있는 국가 연합체의 도움 없이 그들 교회 청소년 양육을 추구하였다. 1922년부터 1950년까지 ICRE는 교단 청소년 사역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1950년에 ICRE는 여러 국내와 국제 기관의 연합으로 미국 NCC의 기독교교육 분과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보수적인 진영의 청소년 사역은 1930년부터 1936년 미국 경제 공황과 함께 영적 상태도 심각한 침체에 빠졌으며 특히 지도력이 약화되었다.14)

여기에서 교육으로서의 청소년 사역을 학원 사역이란 형태로 조명하며 역사적으로 발전해 온 형태를 중심으로 살펴본다.15)

Schule: 회당 교육이 진행되어 오다가 독립된 건물과 제도가 생김으로 발생된 것인데 Beth Hassepher(초등학교 과정)와 Beth Talmud(중등학교 과정) 그리고 Beth Hammidrash(고등학교, 전문학교 과정) 등이 있었다. 이는 B.C. 75-64년경에 설립된 것으로 유대인의 신앙 전수를 위해 율법을 읽고 해석하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선민 의식을 후손에게 고취시킨 종교의 수단으로 세워진 학교의 종교화 모델이었다.16)

School: 중세기의 교육 형태로서 수도원 학교, 사원 학교에서는 수도사의 수양과 학문의 연구를 통하여 교역자를 양성하였는데 성경, 철학, 신학, 수학, 그리스 문학 등을 교수하였다. School 형태의 교육 기관에는 외곽 학교 혹은 문법 학교가 있었는데 이는 성직자와 귀족 이외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교육 형태로 성속을 통합한 교육 내용 즉 의학, 법률학, 신학 등을 강의했다.17)

Universitas: 중세의 종합 대학으로 공식 교육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대학은 중세의 산물이며 신앙과 문화의 종합으로 교회의 후원 하에 설립되었고 또한 발전되었다. 이 당시의 대학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역할을 국가와 교회가 더불어 분담하였다. 국가는 왕적 역할을 정치 조직을 통하여 수행하였고, 교회는 제사장적인 역할을 감당하였으며, 대학은 심판자이며 예언자적인 기능을 사회에 대하여 행하였다. 이 때 대학의 성격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로 신학 교육을 위주로 설립한 대학으로 파리 대학, 옥스퍼드 대학, 캠브리지 대학 등이었으며, 둘째로는 국가나 도시의 요구에 의해 설립된 대학으로 법학을 중심으로 설립된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 의학을 중심으로 설립된 살레르노 대학 등이 있었다. 당시의 학문은 신학을 중심으로 연구되었으며, 대학은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영위되었다고 할 수 있다.18)

17세기의 산업 혁명 이후 사회 구조의 변화에 의하여 정교가 분리됨으로 교육의 주도권이 교회의 간섭을 거부당하게 되었고 제도적으로도 교회의 설 자리가 과거보다 위축되었다. 이 때를 같이 해서 ‘학원 선교’란 말이 전문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19) 이 때를 중심으로 학원 선교의 역사를 대략 5단계로 본다.

첫째 단계는 1780년경 정교 분리 원칙에 따라 기독교 대학에서는 목사가 총장이 되어 학교 행정과 교육을 도맡은 형태의 시기이다. 둘째 단계는 학교가 커지자 총장은 목사가 하되 전문적 성경 교수 제도가 생기게 된 시기이다. 셋째 단계는 예배, 상담 등 교회와의 관계를 맺기 위해 교목 제도가 생기게 된 시기이다. 넷째 단계는 문자 그대로 학원 선교가 등장한 시기이다. 정교 분리 원칙에 따라 공립·주립 대학에서 기독교교육이 불가능하게 되어 유능한 학생들이 주립 대학으로 몰리게 되자 미국 교회는 주립 대학 정문 밖 변두리에 건물을 짓고 교목을 파송, 선교를 한 것이 이른바 학원 선교이다. 다섯째 단계는 학원 선교 단체의 형태이다. 학원 선교의 한계를 깨닫고 학생 운동이 학원 자체(기독교대, 주립대)에서 자생하게 되었다.

B. 전도로서의 청소년 사역

대공황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말미암아 청소년들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특히 미국에서 새로운 사회적 현상으로 부각되었다. 1930년경 미국 고등학생 등록수가 6백6십만 명을 넘어섰고 사춘기 문화(adolescent culture)의 존재도 무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주류 교단들이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선교 영역이 바로 이 사춘기 청소년이었다. 이 때 청소년 문화를 예리하게 인식한 여러 학자가 청소년 선교 운동을 시작하였으니, 그들은 Arthur Wood, Lloyd Bryant, Jack Wyrtzen, Evelyn McClusky, Percy Crawford, Jim Rayburn 등이다.

사춘기 청소년에 대한 선교 사역의 기초는 1904년 아일랜드 전도자인 Fredrick and Arthur Wood에 의해 놓였으며 대영제국에 확산시켰다. 이들의 열정이 열매를 맺어 1911년에 청소년 선교를 위한 Young Life Campaigns가 대영제국 여러 곳에 조직되었다.

한편 미국에서 1929년에 Llyod Bryant는 수많은 청소년 선교의 비전을 품고 비기독교 청소년에 접근하였으며, 그 결과로 The Christian Youth Campaign of America가 결성되었다. 이 캠페인으로 뉴욕의 타임즈 스퀘어에 수요일과 목요일 밤에 수많은 인파가 몰리게 되었고, 1935년에는 이 단체의 이름이 The Association of Christian Youth in America로 변경되었고, 그 사역은 영국의 Young Life Campaigns의 모델에 따라 구조 조정을 하였다.

1931년에 Percy Crawford가 The Young People’s Church of the Air를 필라델피아에 설립하였으며, 호주 복음전도자 Paul Guiness는 캐나다 브랜포드를 방문하여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청소년 운동을 설립하는 시도를 하였다. 1934년 Oscar Gillian은 Voice of Christian Youth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어 청소년 사역을 하였다. 1933년에 Evelyn McClusky는 The Miracle Book Club을 오레곤 포트랜드에 창설하였다. 1938년에 이 단체는 전 미국에 걸쳐 1,000개 이상 만들어졌다. The Miracle Book Club의 4가지 목표는 다음과 같다.20)

① 고등학생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으로 초대한다.

② 회심자가 그들 안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참된 의미를 인식하고 이해하도록 한다.

③ 회심자가 새로운 기독교적 삶의 양식을 성공적으로 이루도록 도모한다.

④ 학생들이 그들의 신앙을 동료들에게 증거하는 기독교 전파자가 되도록 가르친다.

McClusky의 클럽은 후에 Youth for Christ 운동의 리더십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The Miracle Book Club을 섬겼던 사람들이 후에 YFC의 지도자가 되었다. YFC 클럽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Jack Hamilton은 The Miracle Book Club (Kansas City, 1941) 부의장이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의 Christian Endeavor와 기타 다른 단체들이 교회 청소년의 양육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하였던 바와는 달리 20세기 초기와 1930년대 중반까지의 The Miracle Book Club과 다른 단체들은 회심자를 얻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이와 같이 청소년 사역에 있어서 부흥과 양육, 회심과 교육, 전도와 제자화라는 신학적 구분이 첨예하게 되었다.

시카고의 설교가 Torrey Johnson은 th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NAE)의 중요한 지도자로서 1944년 5월 26일 첫번째 시카고랜드 YFC 집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때 설교자로 초청받는 사람이 지역 교회의 젊은 담임 목사였던 Billy Graham이었다. 1944년 10월 21일에 시카고 스타디움에서 열린 집회에 28,000명이 운집하였으며, 시카고랜드 YFC 첫번 기념식을 1945년 5월 30일에 열었는데, 이 때 모인 수는 70,000명이었다. 당시 설교가는 Percy Crawford였다.

많은 설교가와 강사들이 다른 어떤 집회에서보다도 YFC 집회에 성령의 역사가 강하고 쉽게 설교할 수 있다고 하였다.21) Roger Malsbary가 청소년 선교 운동을 하는 단체의 결성의 비전을 가졌는데, 마침내 1945년 7월 29일에 YFC International가 결성되었다. Torrey Johnson이 의장으로 지명되었다. 1945년 헌장의 첫 조항은 YFC International의 4대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22)

① 어느 곳에서나 청소년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을 촉진하고 돕는다.

② 도처에서 전도를 장려한다.

③ 밝고 영광스러운 기독교적 삶을 강조한다.

④ 기존의 기관을 통한 청소년의 국제적인 봉사를 촉진한다.

NAE와 YFC International은 미국에서 복음주의(evangelicalism) 태동에 초석이 되었기에 YFC의 발전과 복음주의의 성장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청소년 전도에 뿌리를 둔 신학은 청소년 교육을 형성하는 양육의 신학과 강한 대조를 이룸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

청소년 선교 혹은 사역을 전도로 보느냐 교육으로 보느냐는 문제는 최근까지 논쟁의 주제로 대두되었다. 보수적인 신학은 전도를 중시하고 진보적인 진영은 교육에 우선권을 둔다. 전자는 전도와 제자도를 청소년 사역의 핵심적인 이슈로 간주한다.23)

III. 학생 선교 운동

학생 선교 운동은 근대 선교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동시에 이천년 교회 역사상 대규모의 본격적인 청소년 선교라고 할 수 있기에 따로 그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A. 18세기 이후의 학생자원운동24)

1. 옥스퍼드 대학의 홀리 클럽 운동

1729년 옥스퍼드 대학생이었던 찰스 웨슬리 한 사람이 자신의 신앙 성장과 경건 생활을 위해 만든 작은 모임에서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홀리 클럽이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분명한 결단 가운데 새벽 5시에 일어나 엄격히 규정된 일과를 시작했으며, 기도, 금식, 금욕의 강훈련을 감당했다. 홀리 클럽의 운동은 성경 중심적이고 신본적인 영성 훈련 운동이었다.

2. 캠브리지 대학의 기독 학생 운동

찰스 시메온이 이끈 캠브리지 대학의 영적 각성 운동은 영국의 영적 부흥과 세계 선교에 큰 공헌을 하였다. 당시 영국 국교회는 영적으로 매우 침체되어 있었고, 목회자들은 성직을 일신의 영달을 꾀하기 위한 하나의 직업으로 여겼다. 이렇게 무기력하고 생명력이 없었던 영국 국교회 가운데 찰스 시메온은 말씀을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복음의 중요성을 강력히 설파한 메시지를 통해 새 바람을 일으켰다.

3. 허드슨 테일러와 캠브리지 7인의 선교 운동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CIM)를 설립했다. CIM의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교파나 성별, 학력을 초월해 영적 자질이 있어야 했으며, 물질 자립의 믿음이 필요했고, 중국인들과 함께 거하며 중국 옷을 입고 중국어로 말해야 했다. 이러한 영적이고 개방적인 허드슨의 선교 사역은 캠브리지 대학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당시 캠브리지 대학생들은 무디의 전도 집회를 통해 영적으로 각성된 상태였다. 이들 중 보샴, 카슬, 스터드 등 캠브리지 대학생 7명이 허드슨의 사역과 선교 비전에 감명을 받고 CIM에 가입했다. 상류층 자녀들이었던 캠브리지 7인이 중국 선교사로 결단한 것은 사회적인 화제 거리였으며, 영국은 물론 미국 대학가를 영적인 열정으로 뜨겁게 했다. 미국의 학생자원운동(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 SVM)도 캠브리지 7인의 선교에 자극을 받아 일어난 운동이었다.

4. 독일 경건주의 운동

이 부분에서 근대 개신교 선교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후에 복음주의 운동의 한 맥이 되며 다음 항목에 나오는 진젠도르프와 헤른후트 형제 공동체와도 연관성을 가지는 이유로 해서 독일 경건주의 운동과 청소년 선교라는 본 논문의 주제를 다루기 전에 종교개혁 이후의 선교 운동 네 가지 흐름을 간단히 언급하고, 경건주의 운동의 지도자인 필립 야콥 스패너(Philipp Jacob Spener 1635-1705)와 아우그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 및 경건주의 운동으로 산출된 대학 선교 운동의 열매로서 인도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지겐발크(Bartholom둼s Ziegenbalg 1682-1719)와 플뤼차오(Heinrich Pl웪schau 1676-1752)에 대해서 간단히 정리한다. 그리고 경건주의 운동과 선교의 의의를 제시한다.25)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 선교 운동에 대한 네 가지 중요한 흐름이 있다. 첫째는 영국에서의 청교도 운동, 둘째는 독일에서의 경건주의 운동, 셋째는 모라비안 운동, 넷째는 영국과 북미로 뻗어 나갔던 감리교 운동이다. 이것이 근대 이전의 중요한 개신교 선교 운동이다. 이 네 가지 운동은 종교개혁의 선교적 흐름을 계승·발전시킨 것이고, 또 하나는 종교개혁 가운데 특수한 재세례파의 영향도 계승·발전시킨 것이다. 그 중에 재세례파가 강조하는 개인적 회심, 하나님께 대한 깊은 헌신,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삶, 특별히 재세례파의 신학적인 측면인 전도하고 선교하고 사회 변화하며 문화를 변화하는 면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래서 이런 네 가지 흐름의 첫번째 특징은 순전한 회심을 강조하고, 둘째는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삶,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것이 새로운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고,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어떤 학문의 자료가 아니라 신앙생활의 원천이요 길잡이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며, 넷째는 평신도 남녀가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17세기에 들어가서 개신교 스콜라주의, 정통 교리를 주장하는 이들이 등장했을 때, 원래 깔뱅이나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신앙생활에 개신교적 신앙, 개인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삶을 다시 부활시키는 면에 있다.

경건주의 운동은 루터의 전통이 있는 독일에서 일어났으나 17세기 독일은 갱신이 필요한 때였다. 즉 썩었고 부패하고 비극적인 상황에 있었다. 로마 가톨릭이 수많은 개신교도를 살해하였고, 독일의 사제들은 세속 군주의 시녀 노릇을 하였으며 교육 수준이 낮아서 무식하였다. 평신도는 교회의 삶에서 수동적이고 의존적이었고, 도덕적, 윤리적 수준이 저하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교회적 배경에서 필립 스패너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신앙 관계를 회복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경건주의의 기본 초점은 첫째는 신앙은 교리에 대한 신념이나 확신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요, 이것이 참된 신앙이라는 것이다. 신앙의 기본 개념에 대한 본질을 밝혔다. 둘째는 평신도의 역할을 중시하고 강조한 것이다. 평신도가 예배의 수동적 참여자가 아니라 평신도가 소그룹으로 모여 기도 모임을 하고, 예배 후 모여서 설교에 대한 토의도 한다. 이 전통은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셋째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적인 삶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술 취하지 말고, 윤리적 도덕적으로 달라야 한다. 도덕과 윤리를 고상하게 격상시키는 운동이다. 넷째로 성경은 신학적인 자료나 논쟁거리로 사용될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과의 깊은 개인적이며 인격적인 신앙의 원천으로서 본다는 것이다. 다섯째로 경건주의 운동은 선교를 했다는 점, 이상의 다섯 가지 신학적, 신앙적 초점을 분명히 하였다.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필립 스패너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성장했는데, 거기에서 그는 깔뱅적인 전통과 루터적인 전통을 다 흡수하고 청교도적인 전통도 종합했다. 나중에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의 목사로서 활동하면서 당시의 형식적인 신앙, 부패하고 타락한 삶, 술 취함 등 수준이 낮은 윤리, 도덕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신앙 훈련을 시키고 권징을 했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가정에서 소그룹으로 모임을 가졌다. 그는 거기에서 기도하고 성경 공부하고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가정에서 모인 소그룹을 ‘경건주의의 대학’이라고 이름 붙이며 또 ‘교회 안의 작은 교회’(A church within the church)라고 말할 수 있다. 경건주의 운동 선교의 뚜렷한 특징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경건주의 선교는 오직 신앙,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만민제사장직을 주장하였으며, 사제도 회심해야 된다고 하면서 새로운 탄생과 거듭남을 강조했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 영성에 대해서 강조한 이것이 전독일로 확산되고 로마에까지 특별히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확산되어 루터 정통주의로 변해 버린 교회에 상당히 새로운 운동으로 일어났다.

필립 스패너의 후계자로서 등장한 프랑케가 이 경건주의를 더 확산시키고 부흥 발전시켰다. 그는 할레 대학을 세워 경건주의의 본산으로 삼았다. 할레 대학의 교수로 활동했던 프랑케가 대학을 경건주의의 중심으로 삼고, 수백 명의 젊은이를 훈련하고 교육해서 파송하였다. 그는 대학만 아니라 고아원을 설립하고, 사람들을 교육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서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 봉사를 감당했다. 18세기 초에 할레 대학 출신인 지겐발크와 플뤼차오가 덴마크-할레 선교회 소속으로 인도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이들은 선교의 방향을 다음과 같이 잡고 실천하였다. 첫째로 선교는 교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어린이들이 중요하기에 교육을 중시하였다. 두 번째로 성경 말씀을 지방어, 본토어로 번역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세 번째로 그들의 문화와 전통 종교에 상당히 신중히 접근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문화와 종교를 연구하고 그들의 세계관을 파악했다.

스패너의 ‘교회 안의 작은 교회’ 운동은 평신도도 성경을 연구하게 함으로써 성경과 일반 성도 사이의 벽을 허물었고, 평신도에게 전도와 기도 등 영적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만인이 제사장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스패너의 후계자로 알려진 프랑케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동료 강사들과 함께 소그룹 성경 연구반을 만들었다. 성경을 짧지만 깊이 있게 공부하고 개개인의 삶에 적용시키는 데 역점을 두었을 때, 성경 공부반은 대학 내외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프랑케의 할레 대학의 사역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스패너-프랑케 식 경건 훈련을 받은 학생들이 6,000여 명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할레 대학은 루터파 교회들을 복음 중심적으로 변화시키는 경건주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할레 대학을 통해서 60여 명의 선교사가 배출되었다.

5. 모라비안 선교 운동

모라비안 선교 운동은 니콜라우스 진젠도르프(Nikolaus Graf von Zinzendorf 1700-1760) 백작이 시작했는데, 그의 아버지가 경건주의적인 경향이 있었다. 그 영향으로 진젠도르프는 신앙적으로 자라나고, 청년이 되어서는 할레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며, 선교 동아리에 들어가 활동을 하였다.

진젠도르프 생존 당시에 체코나 모라비아 등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방랑하고 유리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별히 개신교 계통의 피난민들이 진젠도르프의 영지를 찾아서 몰려들어왔는데, 진젠도르프는 이 사람들을 다 수용하고 그들이 정착하도록 도와 주었다. 그래서 이곳에 수백 명이 모여 살면서 ‘주님이 지켜 주시는 헤른후트’(Herrenhuter, Lord Watch)라고 불렀다. 진젠도르프는 순수한 신앙의 사람으로서 목사가 되었고 그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1721년 8월에 모라비안 오순절 운동이 일어났으며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체험하고 은혜를 받았고, 그 이후에 전세계를 향한 선교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절제 있는 생활을 하고, 결혼하는 것 한 가지만 빼고는 수도원과 같았다. 그들은 교회 갱신과 선교에 헌신하였다. 교회를 갱신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독립 교단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러시아, 시베리아, 북미, 남미 등으로 선교사로 나가게 되었다.

특히 북미의 인디언들에게 선교를 하고 교회를 개척하고, 당시 인디언을 약탈하는 사람들로부터 인디언을 보호하고, 공동체를 형성했던 점이 선교사적으로 의의가 크다. 이 모라비안 교도들은 종교개혁 이후에 개신교를 정화시키는 촉매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했으며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모라비안 형제 공동체의 생활을 보면 나이, 성별, 결혼 여부 등을 참작하여 교인들을 여러 조로 편성하고, 각 조마다 영육 간에 지도력 있는 지도자를 임명하여, 의식주를 공동으로 해결하고 노동과 신앙 교육을 철저히 지켰다. 진젠도르프는 교리와 형식 교육에 치중하는 정통주의적인 삼위일체설보다는 이방인들에게 어린 양 예수의 고난과 속죄를 그의 신학의 중심으로 삼았고, 마음에 신앙이 생기면 그 때에 가서 신론과 성령론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였다.26) 모라비안 형제 공동체는 하나의 공동체가 선교 기관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며 선교 실천에 앞장섰던 사례가 되며, 이런 경우는 근대 선교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의 선교는 사회 정치적 관계를 우호적으로 조성하며, 선교 현지의 상황과 전통을 존중하는 접근법을 택했고 모든 사람을 인종, 민족, 국가의 다름과 차이를 초월하여 평등하게 대하였다.27) 이런 선교 정신이 후대 선교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6. 건초더미 기도 운동

미국에서는 건초더미 기도 운동(Haystack Prayer Movement)의 사무엘 밀즈 2세(Samuel Mills Jr., 1738-1818)가 등장하면서 기독 학생 운동이 시작된다. 그는 형제회(A Society of Brethren)를 세워 수백 명의 선교사를 배출했으며 미국 기독교계가 세계 선교에 눈을 뜨게 하는 데 앞장섰다. 사무엘 밀즈의 선교 활동은 그의 말대로 “우리에게 소원만 있다면 선교의 문은 열릴 것이다.”라는 믿음에서 시작했고 그 믿음으로 승리했다.

형제회는 해외 선교에 관심과 흥미를 심고 해외 선교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선교사 지망생들을 모으고 키우고자 했다.

B. 학생자원선교운동28)

YMCA, 프린스턴 선교회 등 여러 학생 운동은 헐몬산 수양회를 계기로 서로 연합하면서 범사회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헐몬산 수양회는 무디가 학생들에게 선교 비전을 심어 주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는데 학생들은 이 곳에서 해외 선교에 도전하도록 강력하게 촉구하는 피어선 박사의 설교를 듣는 가운데 세계 선교를 일생의 소명으로 영접했다. 이 운동의 발달과 초기의 성공은 프린스턴 대학 졸업생이었던 로버트 윌더(Robert P. Wilder)의 선교 비전과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전도자였던 무디(D. L. Moody)의 성령의 역사, 당시 코넬 대학교 학생이었던 존 모트(John R. Mott)의 천재적인 조직력에 힘입은 것이었다.29) 믿음과 열정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한 소명 의식이 없었던 미국 학생들에게 세계 선교는 확고부동한 좌표를 제시했던 것이다.

헐몬산 수양회 이후 학생들의 세계 선교 운동을 위해 북미 학생 운동을 주도할 공식적인 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미국 학생자원선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 SVM)이 탄생되었다.

학생자원운동은 세계 선교에 있어서의 청년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힘있게 논증하고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표어는 “우리 세대 안에 세계를 복음화시키자”였다. 50여 년 간 이 운동은 십만여 명의 선교 헌신자를 배출하였고, 이만 오백여 명의 학생을 해외 선교지에 파송했다.

SVM의 다섯 가지 목표는 다음과 같다.

① 학생들로 하여금 선교는 그들의 일생의 사업임을 개인적으로 깊이 깨닫게 한다.

② 그렇게 하기 위해 해외 선교에 대한 연구와 활동에 자원하는 학생들을 그들의 파송 단체에 직접 지도를 받기 이전까지 양육한다.

③ 이 학생들이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공동의 운동이 되도록 연합한다.

④ 수많은 파송 단체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충분하고도 잘 훈련된 자원자들을 확보한다.

⑤ 본국에 남아 기도와 물질과 홍보로써 선교 사업을 강력하게 후원하려는 학생들의 지적이고 정적이며 행동적인 관심을 창출해 내고 유지하는 것이다.

50여 년 동안에 SVM을 통해 해외 선교사로 나간 사람 중 1/3은 중국에서 사역하였고, 인도에서 1/5 등이 사역하였다. 학생자원운동은 한국에 복음이 전파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끼치기도 했다. 한국에 온 많은 선교사가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학생들의 자발적인 세계 선교 운동으로서 학생자원운동의 목적은 선교 자원자들을 동원하고 교육·훈련시켜 각자 속한 교단이나 교회 선교부를 통해 선교사로 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1891년부터 4년마다 국제 대표자 회의를 열어 SVM의 활동을 점검했는데,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에서는 4,346명이 중국, 인도, 아프리카, 일본, 남미 등의 선교사로 나갔다는 보고가 있었다. 국내 선교 역시 활발했는데 한 통계 자료에 의하면 1911년 미국과 캐나다의 50여 개 대학의 선교사로 파견된 자원자는 4,784명이었다고 나와 있다.

SVM은 1920년 절정기를 고비로 급속히 쇠퇴하였는데, 그 이유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신앙의 약화와 선교 지상명령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초기 SVM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폭적 신뢰와 순종,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겸손히 따름, 성경 공부와 기도 생활에 철저한 헌신을 하였으며, 선교에 대한 불타는 사명감과 구체적인 헌신이 있었다. 그러나 후기 SVM 지도자들은 초기 지도자들의 방향과 목적을 상실하고, 선교의 현실적인 타당성과 가능성에 대해 더 많이 논의했고 선교 비전도 없었다. 복음전도보다는 경제 개발, 국제 평화, 사회 정의와 인종 차별과 같은 문제에 몰두했고, 성경을 연구하지 않았고, 전도의 필요성조차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초기의 선교 열정과 비전을 잃어버린 SVM은 다른 기독 단체에 흡수되었다가 결국 1969년에 해체되었다.

SVM은 말 그대로 학생자원선교운동이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학생들이 말씀과 기도 가운데서 선교 비전을 키웠으며, 선교의 원동력인 성령의 힘을 덧입어 선교지로 나가든지 국내에서 선교사를 후원하든지 선교적 삶을 살았다. 이와 같이 SVM의 자발성에서 하나님의 일은 성령의 역사를 따라가는 것이라는 점을 배우게 된다. 또한 SVM은 1894년부터 20년 동안 선교 지원자들을 체계적으로 교육시켜 선교사들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켰다.

IV. 나오는 말

한국 교회 미래 역사와 운명을 결정짓는 다음 세대 청소년 선교는 반기독교 정서가 팽배하며 자본주의와 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적인 가치관을 제공하는 사회 문화에서 중차대한 과제임을 인정한다. “사탄이 한 세대를 하나님 없이 존재하도록 만들면, 사탄은 그 이후의 모든 세대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30) 라는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할 때이다. 이러한 때 교회는 자기 보존과 자리다툼과 지도자의 갈등과 비윤리성으로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으니 실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시대적 절박한 도전 앞에서 필자는 본 논문에서 과연 우리는 청소년 선교를 어떻게 정의하고, 그 역사의 흐름은 어떠했는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왜냐하면 역사를 아는 것이야말로 단순한 과거의 기억을 재생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의 사건과 인물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통해 오늘 우리의 삶과 선교에 지혜와 교훈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을 통해 선교의 하나님께서 선교하는 그의 백성들을 새롭게 하시고 새로운 사명과 비전을 주셔서 하나님의 선교 역사를 이어 가시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본 논문의 연구를 통해 얻은 결과를 요약하자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청소년 선교 운동의 역사를 통해서 청소년이 선교의 대상으로서는 물론 선교 주체로서 점점 그 중요성이 더해진다는 점이다. 주일학교 운동도 청소년의 필요에 부응하는 사역이었으며, 청소년들이 자체적으로 조직을 구성함으로써 청소년 사역의 목적과 프로그램을 형성하게 되었다. 세계 정세의 변화와 과학 혁명, 사회 문화의 급격한 변화 등에 의해 교회의 청소년 사역에 도전과 문제점을 야기했다. 이러한 새로운 도전과 문제를 안고 씨름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도움과 능력으로 새로운 청소년 사역을 만들어 가는 것이 선교의 과제임을 역사는 제시한다.

청소년 선교 운동 혹은 청소년 사역이 전도인가 아니면 양육인가 하는 문제가 첨예하게 대두되었지만, 청소년이란 말 그 자체가 너무나 자명한 것처럼 선교에 전도와 교육이 다 포함된다는 통전적 선교관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이제는 더 이상 대립과 갈등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선교 현장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무의미하지도 않을 것이다. 자기가 가진 신학 입장도 중요하지만 정작 선교의 파트너인 청소년의 고민과 필요에 부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드는 사역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본 연구의 두 번째 결과는 19세기 이래로 발전되어 온 청소년 선교 운동, 특히 대학생 선교 운동의 역사적 교훈이다. 대략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은 구원 역사에 쓰실 사람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 시대는 물론이고 교회역사에 엄연히 나타난 현상이다. 특히 19세기 이래의 기독 학생 운동사에 나타난 영성 훈련의 특징은 성경에 기초한 엄격한 훈련이었고, 훈련의 주체가 성령이었으며, 영적 지도자를 양성하는 소수 정예의 제자 양성이라는 점에 있다. 둘째로 기독 학생 운동은 세계 선교라는 뚜렷한 이상과 신학적 정체성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순교’ 정신으로 헌신했다. 셋째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조직은 성령 충만했고 자발적이며 창조적이며 깨어 있었다. 항상 신속 정확하지만 단순하고 소박한 조직과 행정 체계를 유지한 덴마크-할레 선교회, 모라비안 선교회 등은 정체되지 않고 언제나 살아 있는 복음 운동의 좋은 본보기였다. 넷째로 기독 학생 운동은 복음적인 교회 연합 운동에 적극 동참한 것과 평신도 선교 사역 및 사회 개혁과 문화 창달에 기여한 바가 크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를 참고하면서, 향후 한국 교회와 선교는 영·유아는 물론이고 청소년 선교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며, 범교회적인 선교 실천을 연합과 협력으로 이루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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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stract ■

Historical Research of the Youth Ministry

Young Dong Kim

Korea’s population is forecast to decline beginning in 2020 due to its low fertility rate. If the birth rate stays at its current level, it will drain the nation’s labor pool and create demand for an improved social safety net to cope with the aging population. Not just social problem, but also the challenge to church and mission will be caused due to the declining population, especially because the children and youth population will be reduce rapidly. More critical point for the future Korean church is so to speak ‘the unreached generation’. This means the new generation, who are no more confess christian faith, even though their parents are committed christians. That’s why we have to focus on the theme of youth ministry.

In this research I am studying the historical context of youth ministry, because I want to find out how youth ministry be developed through the christian and missionary history in oder to help church minister and youth worker understand how youth ministry should be defined theologically and so that they facilitate their youth ministry more efficiently and effectively.

The way we outline the historical context of youth ministry is greatly dependent on how we define youth and youth ministry. It is common that youth means teenager, but this research takes the position that youth is to designated as the period of human development sociologically defined as adolescence. For the practical purpose this research takes teenager and student as youth. It also accepts that youth ministry could be defined both youth evangelism and youth education. Youth ministry has multi-dimensional work, on the one hand, it does intentionally evangelize youth and student, on the other hand, it give commitment to the educational components. Youth ministry has to be both missional and educational - concerned with both evangelism and discipleship. Although the history in a sense shows the dichotomy between missions and education, evangelism and discipleship, it is false theological dichotomy. The purpose of youth ministry cannot be one-sided. While it is important to understand this holistic perspective as it is revealed in the christian history, it is equally important to reflect on the impact this perspective has on contemporary youth ministry and on the future history of youth ministry.

This research is composed of two main chapters. At first, it deals the history of youth ministry as evangelism and education. Secondly,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student missionary movement is handled as the pivotal power of the modern protestant missionary movement. The limitations of this research is that the history of youth ministry is to be studied mainly by focusing on the English and American missions. Next, the section of the history of youth ministry as evangelism and education use Mark W. Cannister’s research, “Youth Ministry’s Historical Context: The Education and Evangelism of Young People,” (in : Kenda Creasy Dean, Chap Clark, David Rahn(ed.), Starting Right : thinking theologically about youth ministry, Grand Rapids, MI : Zondervan Publishing House, 2001, 77-90) as the primary source.

The main results of this research are summarized, firstly, youth is not just the object of youth ministry, but also its subject. secondly, youth as the agent of God’s mission is filled with Holy Spirit and trained as disciple, and committed themselves totally and voluntarily. Youth ministry has great impact on the formation of the ecumenical movement, the lay missionary work, and social, cultural renewal.

Key Words

Youth, Youth Ministry, Evangelism, Education, Student Volunteer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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